“이 집은 좀 남 다르다.” 라는 분위기의 공간에 들르면 심심치 않게 마주하는 책이 있다. 세련되고도 감각적인 청록색의 표지에 흑백 사진이 중앙에 실린 겉 표지가 매력적인 패티 스미스의 [몰입] 이라는 책이 바로 그것. 이 책의 진가를 알아본 힙스터라면 한 번 쯤 인스타그램에 올렸을 법한 문장이 있다.
우리는 왜 글을 쓰는가?
합창이 터져 나온다.
그저 살기만 할 수 없어서.
한 번쯤 터져 나오는 마음으로 글을 써본 사람이라면 ‘어머 이 책은 사야해.’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마법의 문장.
나에게 왜 춤을 추느냐고 묻는다면 이 마법같은 힘을 빌려 말하고 싶다.
에리카팕은 왜 춤을 추는가?
합창이 터져 나온다.
그저 듣기만 할 수 없어서.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자면 몸 구석구석에서 합창처럼 터져 나오는 움직임을 참을 수가 없다. 참을 수 없는 움직임을 숨기기 위해 자주 발목을 풀거나 어깨와 목을 돌려 뻐근했던 몸을 푸는 척을 한다. 피곤하다는 인상이 묻어나오는 눈 깜빡임 연기까지 곁들이면서. 몰래도 열정적이다. 인적이 드문 지하철역에서는 주변을 둘러보고 전방 5m 내에 아무도 없는 것이 확인되면 스크린도어를 거울 삼아 몇 스텝이라도 발 재간을 부려본다. 겨울이면 더 좋다. 크고 길다란 코트 안 쪽으로 조금이라도 움직여 볼 수 있으니까. 그 중에서도 9호선 한성백제역은 특히나 인적이 드물고 플랫폼이 광활 해서 지하철을 기다릴 때면 거의 매번 몰래 발을 놀린다. 주변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면 바로 발끝을 바닥에 콕 짚고 발목을 둥글게 굴려 발목을 푸는 척 먼 곳을 바라보거나 중요한 연락이 온 것도 아니지만 미간을 찌푸리고 핸드폰을 쳐다보기도 한다.
발재간만으로는 영 부족할 때가 있다. 이어폰 너머로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비트가 흘러나올 때. 가슴이라도 쿵 하고 앞으로 퉁겨보거나 (물론 몰래) 비둘기처럼 목을 앞뒤로 까딱인다. 갑자기 또 주변이 의식되면 옷 뒤쪽에 상표가 까실 거려 불편한 척하는 생활 연기를 곁들인다. (왜 이렇게 체계적으로 쫄보일까.) 이런 경험이 나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아니 확신한다. 나만 그럴 리 없다고.
그렇게 확신하게 된 계기는 ‘내적 댄스’라는 말이 유행한 다음부터 였다. 언제부턴지 모르겠지만, ‘내적 댄스 유발’, ‘내적 댄스 폭발’ 이라는 단어가 인터넷 상에서 심심치 않게 보였고, 각종 매체에서도 자주 사용되는 말이 되고 나서는 ‘그래 다들 속으로는 춤을 추고 있었던 거야.’ 하며 내심 안도했다. 내적댄스 시류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스스로 ‘내적 댄스 안무가’ 라고 부르기로 자청하게 되는데… ‘내적 댄스’ 라는 말을 많이들 쓰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다들 내적으로는 한 땐스들 하시는 것 같으니, ‘내적 댄서’ 로는 나를 명명하기가 부족했다. 머릿속으로는 실제 세계에서 내 몸뚱아리로는 잘 안되는 다리 찢기 라던지, 빠르게 상모 돌리기 라던지, 등을 꺾듯이 뒤로 젖혀 버티는 동작이라 던지, 심지어 파트너가 필요한 듀엣 댄스까지 상상 속에서는 안되는 춤도 없거니와, 자주 듣는 음악이라면 가끔 연결이 되는 안무를 상상하는 적도 일상 다반사였으니까. "그럼 내적 댄스 안무가라고 해도 영 틀린 말은 아니지 않나?!"하는 뻔뻔함으로 나의 두 번째 독립 출판물 [우_잉 : o_0] 의 작가소개란에 처음으로 ‘내적 댄스 안무가’ 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부터 꿔왔던 안무가 라는 오랜 꿈은 ‘내적’이라는 단어만 붙여주어도 금방 현실이 됐다. 내적 세계에서 벌어지는 일을 딱히 증명할 길이 없다는 점에서 아주 폐쇄적인 명명이지만 또 같은 이유에서 안전한 명명이기도 했다.
아무도 없는 공공장소에서 잠시 두둠칫대는 것으로 패티 스미스 몰입의 명문장을 차용하지는 않았을 터. 그렇다. 가끔 나는 외적으로도 춤을 춘다. 몸 구석구석에서 터져 나오는 춤을 작정하고 추는 날들이 있다. ‘작정하고’ 라는 말에는 ‘카메라를 켜고’ 라는 말이 들어갈 수도 있으며, ‘연습실을 빌리고’ 라는 말이 들어갈 수도 있다. 좀 더 본격적으로 작정한 날은 ‘연습실을 빌려서 카메라를 켜고’ 춤을 춘다. 작정하고 춤을 추는 동기는 희, 노, 애, 락 이라는 인간의 대표적인 네 가지 감정에 따라 구분 지어 설명할 수 있겠다.
‘희’ 나는 비교적 인생의 희열을 자주 느끼는 편이다. 1인 가구 가장으로서 나의 희열은 다름 아닌 분리수거 한 다음 아주 짜릿하게 느끼기 때문. 행여나 싱크대에 쌓여있던 설거지도 다 하고, 퀴퀴하게 고여있던 음식물 쓰레기까지 버렸는데 현관에 쌓여있던 분리수거까지 완벽하게 클리어한 후 아무 냄새도 나지 않고 깔끔한 집을 관람하는 쾌감은 정말 대단하다. 그럴 때는 몸이 삼바를 부른다. 발을 앞 뒤로 왔다 갔다 하며 골반을 좌우로 크게 움직이고, 팔은 허공을 부드럽게 어루어 만지는 동작에 라틴 음악까지 곁들여지면 그게 곧 삼바 아닌가! 그래서 그 기쁨의 순간을 나누고자 #분리수거세레모니 라는 해시태그로 몇몇 영상을 올린 적도 있는데 나와 같은 1인 가구의 가장 뿐 아니라 수 많은 주부 인친들의 공감을 샀다. 정말 저 느낌이라고.
‘노’ 7년 간의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분노하는 순간이 츠암~ 많았다. 직장에서 분노 유발 상황은 다양하게 일어나지만 특히 어린 여자 사원, 대리로 일하는 동안에는 직급과 성별 때문에 무시 받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아니, 종종이 아니고 왕왕. 가령, 나이 어린 여자가 말했을 때는 불통이던 상황이 나이 많은 남자가 나서 주면 그제서야 말을 들어먹는 그런 불쾌한 일들이 왕왕 벌어졌다. 그런 날이면 퇴근하는 길에 소위 ‘디바 Diva’ 라고 일컬어지는 여성 가수들의 노래를 들으며 힘찬 위로를 받았다. 이를테면 비욘세, 크리스티나 아길레라, 레이디 가가 등등… 풍부한 성량에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있는 가사, 가슴까지 울렁이게 만드는 깊은 진동의 비트가 어우러진 노래를 듣고 있으면 덩달아 내가 가진 힘도 세지는 기분이 들었다. 회사에 있을 때는 위축되고 무기력한 쫄보였다면, 퇴근길에 디바들의 노래를 듣는 그 순간 만큼은 나도 어느 디바로 빙의해보며 한껏 파워 워킹을 해본다. 그 길로 연습실을 예약해서는 그간 내적으로만 추던 춤들을 마구 뽐내 보는 것. 조금 험상궂은 표정도 곁들이며, 바닥을 부술 기세로 쿵쿵 스텝도 밟고, 과감하게 턴을 돌아거나 아예 바닥에 주저 앉거나 누워서 더 과감한 동작을 이어간다. 마치 한 마리 암사자가 된 것처럼. 회사에서는, 일상에서는 거절 못하는 착하고 어린 여자라면 '지금 이 연습실에서 만큼은 이 구역 미친년은 바로 나다.' 하는 느낌으로 비야취 레벨을 한껏 끌어 올려서는 내면에 가득 차있던 화를 춤으로 풀어내며 직장 스트레스를 해소하고는 했다. 그렇게 한참 미친듯이 춤을 추고 바닥에 누워 헉헉대고 있으면 한 낮에 있었던 일들은 모두 기억에서 사라지고 땀 흘리며 머리가 헝클어진 어느 암사자 한 마리만 남는다. 나는 박사원이나 박대리가 아니라 암사자로 마무리되는 하루가 좋았다.
‘애’ 란 원래 슬픔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여기서 만큼은 사랑 ‘애愛’의 의미로 적어보겠다. 세상에는 내가 사랑해 마지 않는 댄서들이 수두룩하고도 빽빽하다. 최근 종영한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의 인기로 댄서들에 대한 인기가 20000% 정도 증가했다. 요즘 모두가 입을 모아 하는 이야기지만 댄서들은 훨씬 이전부터 준비가 되어있었고, 덕질의 타겟이 될만한 스타성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집단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대중에게 알려져야 하는 멋진 댄서들이 너무나 많다. 세상에 이렇게 멋진 댄서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아무래도 유튜브의 발전을 목도한 이후로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유튜브에 하나의 노래를 검색하면 같은 노래로 전 세계 다양한 사람들이 짠 안무를 앉은 자리에서 관람할 수 있다. 가령, Justin Timberlake 의 Filthy 라는 노래를 검색하면 높은 굽의 힐을 신고 요염하게 움직여 표현하는 안무 영상도 있는가 하면, 정통 힙합으로 해석해 스웩을 한껏 뽐내는 안무의 영상도 있고, 곡의 기계음을 십분 살려 사람이 아니라 로보트처럼 표현하는 영상도 왕왕 있다. 그 로보트들도 어떤 안무가가 해석 했는가에 따라 다 다른 모습의 로보트들로 표현된다. 같은 한 곡 을 가지고도 온 세상의 댄서들이 각양각색의 해석을 내놓는 것을 보는 것은 나의 오랜 취미가 되었고, 나도 이들처럼 내가 음악을 듣는 방식으로 춤을 춰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었다. 기저에 깔린 묵직한 비트/ 그 위에 무심하게 튕기는 베이스 소리/ 그 위를 유연하게 미끄러지는 멜로디의 높고 낮음/ 그 위에 맞춤으로 주문한 듯한 가사 그리고 가수의 기교 이 모든 게 마치 라자냐처럼 켜켜이 쌓인 노래 한 곡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고 싶은 식욕과 같달까? 다만 혀와 이가 아닌 온 사지와 오장육부로 음악을 즐겨보는 것. 이라고 하니 세상이 허락한 유일한 마약을 즐기는 중2병 같이 들리기도 하지만… 좌우지간, 음악을 들을 때 나대로 해석하며 이 부분에는 이렇게 움직이면 좋을지 저렇게 하는 게 좋을지 속으로 둠칫 둠칫 해왔던 것이 앞서 말한 합창처럼 몸 구석구석에서 터져 나오는 춤의 근간이 됐다.
‘락’ 작년 가장 즐거운 순간을 꼽자면 7년간의 직장인 생활을 청산하고 마지막 출근을 한 날이었다. 그렇게도 즐거울 수 없었다. 니콜 키드먼이 전 남편인 톰 크루즈와 이혼 소송을 마무리 짓고 파파라치에게 찍힌 그 유명한 사진만큼 개운하고 즐거웠다. 사실 마지막 출근하는 날 훨씬 이전부터 퇴사 기념으로는 어떤 노래에 춤을 추어야 가장 개운할까 기념이 될지 벼르고 있었는데 그렇게 내가 선택한 곡은 “I will survive”. 한국에서는 가수 진주가 “난 괜찮아” 라는 곡으로 번안한 노래로 유명한 노래다. 특유의 매몰차게 이별을 고하는 느낌과 회사를 나가도 나는 잘 살아 남을 거라는 의미까지 퇴사와 이만큼 잘 어울리는 노래도 없었다. 이 노래에 춤을 추겠다고 마음을 먹고는 매일 이 노래를 들으며 얼마 남지 않은 회사 생활을 임했다. 곧 헤어질 연인 면전에 날카롭게 검지를 한 바퀴 돌리며 “뒤 돌아가” 라는 말을 전하는 여자의 매몰차고 도도한 이미지를 상상하며 그간 나를 괴롭히던 모든 얼굴들을 떠올리면 그렇게 통쾌하고 즐거울 수가 없었다. 이제 보니 춤은 나에게 더없이 즐거운 심리치료였다. 종종 춤을 춤추지 않았더라면 몸도 마음도 더 건강하지 못한 상태로 퇴사했을 지도 모르겠다.
이 글을 본 이후로 어느 지하철역에서나 횡단보도 앞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쏟아지는 비트의 주문을 견디지 못하고 발재간을 부리고 있거나 고개를 까딱이는 누군가를 보게 된다면 이렇게 생각해주기를 바란다. 지금 저 사람에게서 희,노,애,락의 합창이 터져 나오고 있구나 라고.
📡 이 글은 움직임을 주제로 한 스토리지 프레스 매거진 move move move 에 기고했던 글입니다. 오늘의 주제 생기와 맞아 떨어져 중구난방 독자들에게만 슬쩍 공개해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