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하면 할 수록 늘기 마련이다. 그러나 마주할 때마다 생경한 것이 있다. 바로 장례식. 물론 내 나이 겨우 서른 셋, 부모님 나이의 어른들이 보기에는 아직 경험이 한참 부족할 나이인 것도 사실이지만 한 살 한 살 먹을 수록 장례식 갈 일이 많아졌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4학년 n반 줄에 있는 큰언니는 갈 수록 결혼식 갈 일은 없고 장례식 갈 일만 많아진다고 했다. 인생 선배이자 우리 집의 소식통 큰언니가 지난 토요일에 대뜸 전화를 해서는 이렇게 말했다.
"지윤아, 이야기 들었어?" 여보세요 도 없이 '이야기 들었냐'니, 꼬꼬무도 아니고 너무 쪼이는 도입부 아닌가.
"무슨 얘기? 들어봐야 들어봤는지 안 들어봤는지 알지~" 긴장되는 마음을 숨기려고 충청도식 너스레를 떨었다.
"시골 고모부 돌아가셨대. 우리 다 보령 가야돼."
새해가 되어 벌써 두 번째 장례식 소식이다. 나한테 시골 고모부는 1년에 한 번 볼까 말까한 먼 친척 어른이지만, 아빠의 매형이자 할머니를 가장 쏙 빼닮은 큰 고모의 남편이 돌아가신 것. 올해 첫 장례식은 작은 형부의 큰 형의 장례식이었다. 모두 나에게 가까운 죽음은 아니었으나 가까운 가족들이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이었다. 당장 차오르는 슬픔은 없더라도 한 발짝 건넌 슬픔에 공감해야 마땅하니 검은 옷을 꺼내 입을 때 애도를 위한 차분한 마음가짐도 같이 껴입었다.
그런 차분한 채비에 산통을 깨는 질문이 끼어든다. "절이 먼저였나, 향이 먼저였나? 형부 아세요?" 세상의 거의 모든 것들을 잘 아는 형부한테 물었다. "절 두 번 하고, 분향하면 될거야." 형부도 확신에 찬 말투는 아니었다. "그럼 꽃은요?" 검색해서 찾아보면 될 일이지만 이런 것은 왜인지 먼저 경험한 사람한테 묻고 싶지 않은가. 장례식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이런 저런 프로세스가 오갔고 이 글을 쓰기 위해 검색해서 몇 가지 옵션을 더 했다. 여러분도 맞춰보시라.
1) 절 2 > 분향 > 헌화 > 상주에게 절1
2) 절 2 > 헌화 > 분향 > 상주에게 절1
3) 절2 > 분향 or 헌화 > 상주에게 절1
4) 분향 or 헌화 > 절2 > 상주에게 절1
5) 분향 > 절 2 > 상주에게 절1
6) 헌화 > 절2 > 상주에게 절1
* 기독교/현대 식인 경우, 절 대신 목례와 묵념으로 대신
* 정답은 맨 아래에
시골의 장례식장은 확실히 도시의 장례식보다 떠들썩했다. 하얀 국화 화환들이 흐드러지게 늘어져 있는 백합실 안에는 사람들이 얼큰하게 가득 차 있었다. 사람도 꽃도 참 많았지만, 꽃들은 하얗고 사람들은 울긋불긋했다. 1층 전광판에서 고모 이름 앞에 '미망인'이라는 한자가 붙여놨다. 2층에서 본 고모는 너무도 태연하게 "왔어들? 신발 잘 챙겨. 잃어버리지 않게". 라며 장례식이 아니라 이바* 감자탕집에서 만난 것 같이 말했다. 호상이었다. 준비했던 애도의 마음이 머쓱할 정도로.
상주들의 젖은 얼굴을 마주하고는 마음이 새하얘졌다. 고모부의 아들과 딸들, 그리고 그 자식들이 이미 다 울어버린 얼굴로 나란히 서있었다. 그제야 누군가의 죽음이 일어나버렸구나 실감이 났다. 죽음은 남아있는 사람들의 얼굴에서 가늠이 됐다. 향, 꽃, 절 어느 것이 먼저인지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장례식은 갈 때마다 익숙치 않다. 같은 검은 옷을 입고 있어도, 각기 다른 슬픔으로 서있는 남은 이들을 마주하면 준비해뒀던 애도의 마음을 꺼내는 대신 내 얼굴을, 그리고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대입하게 된다. 내가 저 자리에 서있으면 어떨지,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 지.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생각하면 잘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칼럼으로 유명한 김명민 교수의 책, [아침에는 죽음을 생각하는 것이 좋다] 책 제목도 같은 맥락일 것. 하루를 더 잘 살기 위해, 생을 더 잘 살기 위해 죽음을 생각하라는 것은 장례식장에서 본 상주들의 얼굴과 영정사진에 자신을 대입해보면 그것이 어떤 말인지 이해할 수 있다.
이쯤에서 공개하는 정답은 두구두구두구두구 대체로 3) 아니면 4) 라고. 분향과 헌화 중 둘 중 하나만 하면 된다고 한다. 참고로 나는 다 한 경우도 있다. 물론 다 해도 상관 없다고 한다. 사실 향이니 꽃이니 절의 순서보담도 그 자리에 찾아간 애도의 마음이 이미 정답이다. 예절은 어디까지나 예절일 뿐. 그래도 이것만은 기억하자. 누군가에게 웃참 챌린지가 되지 않기 위해 발가락 양말 만큼은 지양할 것. 👣